티스토리챌린지 21

2. 선택자, 박 한 (2-6)

6) 신인류 -------------------------------------------------------------------------------------------------- “그러니까, 지금 당장 너를, 아니 그 뭐냐, 니 나노로봇들을 내 몸 여기저기 심어야 한다는 거 아냐?”나노로봇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몸 여기저기에 나노로봇을 연결해야 한다는 헛소리를 해댄다. 신라호텔 내에 있는 라연 레스토랑의 '신라'라는, 한 끼 27만 원짜리 식사를 룸에서 먹고 있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괜한 잡소리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심는 게 아니라, 보강입니다. 주인님 몸 중 약한 부분들을 보강하는 거죠. 척추, 뇌, 내장 주변은 필수입니다. 물론, 몸 여기저기 안 좋은 곳은 나노로봇 치..

2. 선택자, 박 한 (2-5)

5) 신라호텔 한은 카카오 택시를 타고 장충동 신라호텔에 도착했다. 아이가 "신라호텔, 조선호텔, 워커힐 W호텔"을 추천했는데, 세 곳 중 가장 가까운 신라호텔로 결정했다. 큰 여행가방 두 개를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잘나가는 사업가 같이 자연스러웠다. '그 녀석의 말은 무조건 옳다'는 진리를 또 한 번 깨달았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벨보이가 바로 붙어서 환대를 한다. 마치 중동의 왕자로 착각할 만큼 극진하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지갑에서 5만 원권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좋아 죽는다. 하찮은 지폐 한 장이 많은 일을 해준다. 아이 조언대로 적당히 괜찮은 디럭스룸을 잡았더니, 체크인을 도와준 직원 역시 끝내주게 친절하다. 존중받는 느낌이 확 느껴진다.  자본주의 ..

2. 선택자, 박 한 (2-4)

4) 현금 300억 ------------------------------------------------------------------------------------------- 한은 한남동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했다. 중간중간 CCTV를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7개의 CCTV와 저장장치를 해킹해 고장 내야 했다. 찍힌 영상만 지우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것보다는 일정 시간대의 모든 CCTV를 고장 내는 게 훨씬 더 안전하단다.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더 이상의 설명은 듣지 않고 그냥 믿기로 했다. 아이맨! 곳곳에 깔린 CCTV 보고 있던 한은 갑자기 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났다. 'CCTV 없는 곳이 없네! 세상이 완전 감시의 바다잖아. 최상위 지배 계급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손쉽..

2. P-198(2-4)

2-4 "지금까지 복제인간들과 상담을 해오면서 누가 제일 당신을 힘들게 했나요?""솔직하게요?""당연하죠. 전 거짓말을 간파하는 데는 타고난 재능이 있거든요. 그게 저를 성공으로 이끈 장점 중 하나예요.""눈치가 빠르다는 건 살아가면서 정말 강력한 무기죠. 물론 그만큼의 고통도 따라왔겠지만요.""보아하니 당신도 그런가 보네요. 맞아요, 가끔은 그 무기가 너무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죠.""모든 것은 완벽할 수 없는 법이에요. 강점에도 늘 부작용이 따르듯이 말이죠.""그런데 말을 참 돌려서 잘 하시네요.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혀 하시실 않으셨어요. 음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제일 힘들게 했다는 거죠?""딩동댕! 지금까지는 당신이 최고였어요, 진상 부문에서요. 하하하. 물론 이해합니다. 당신 같은 위대하..

2. P-198(2-3)

2-3 교육 6주차. 최초의 박정우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317년이 지났다. P198 박정우는 교육을 받으며 교관들과 점차 친해졌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그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충격적이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는 극히 일부의 역사학자뿐이며, 그마저도 희미한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알 뿐이라고 덧붙였다. 200여 년 전, 인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고 한다. 기계인간들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인류의 절반 이상을 잃게 했고, 찬란했던 문명은 산산이 부서져 폐허로 변했다. 도시들은 불타고 기록물들은 소실되었으며, 문화유산이라 불리던 수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기술 문명은 사실 그 ..

2. P-198 (2-2)

2-2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납득과 체념은 마치 이슬비처럼 그의 몸과 마음 곳곳에 은근히 젖어들었다. 지금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젊고 건강했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늙고 병든 상태와는 전혀 다른, 생기 넘치는 젊음과 활력을 가지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감사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흐르는 자신의 시원한 오줌줄기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이 천국 같다고 여길 정도였다."복제된 다른 박정우들도 저처럼 반응했나요?""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더군요. 대부분 당신과 비..

2. P-198(2-1)

2-1 박정우 P-198은 2주째 지루하고 고된 회복 프로그램을 반복 중이었다. 그가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정신없이 짜인 스케줄이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12시간 동안 빼곡히 채워진 교육 일정은 토요일도, 일요일도 예외가 없었다. 모든 프로그램은 인정사정없이 진행되었고, 마치 시간이 부족하기라도 한 듯 그를 매섭게 몰아세웠다. 놀랍게도 그의 육신은 불과 2~3일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발전된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이 정도의 회복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머릿속이었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두렵고 불안했다. 폐쇄된 공간에서 쉴새없이 반복되는 교육이 그의 정신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가끔씩 긴 한숨을 쉬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 나이에 이런..

1. 마이어 구겐하임 기지 (1-5)

1-5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감각이 부재한 공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 방법은 없다. 다행히 위험 신호는 감지되지 않았다. 마치 시스템이 안전 모드에 들어간 것처럼 고요했다. 잠시 안도감이 들었다. 자그마한 여유도 생겼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눈은 여전히 떠지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렇게나 무서운 일이었나? 쓸데없는 생각들이 눈덩이처럼 커져 안개같은 몽롱한 두려움을 낳고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를 만들었다. 환생한 것일까?  한창 젊었을 때엔 나는 죽음 이후의 세상은 전혀 믿지 않았다. 영생이나 환생, 사후세계 같은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나의 논리에 어긋났다. 100여년간의..

1. 마이어 구겐하임 기지 (1-4)

1-4 다른 여러가지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가족과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행복했고 즐거웠고 아쉬웠고 슬펐고 고통스러웠다.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던 수많은 기억들도 떠올랐다. 희열과 환희의 감정이 번개처럼 지나갔고 분노와 절망, 좌절과 슬픔이 느껴졌다. 수 많은 사람들을 희생해야만 했던 전쟁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쟁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악몽이었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고통을 겪은 모든 이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잠깐의 황홀함 후에 평생동안 느껴야만 했던 잔혹함을 선사했던 정치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 암투와 배반으로 점철되었던 정치인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정말 떠올리기 싫었던 비루함과 초라함이 다시 그의 뇌를 가득 채웠다. 정치는 잔인했다. 그 때만큼 인간..

1. 마이어 구겐하임 기지 (1-3)

1-3 광대한 우주 속에 유영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얼마나 이렇게 오래 있어야 하나? 지루함이 불안감을 압도할 즈음, 먼 옛날로 느껴지던 기억들이 깜깜한 어둠 속에 비치는 작은 별빛처럼 하나 둘 떠올랐다. 그곳에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언제나 사랑했던 아내, 목숨보다 소중했던 아들, 그리고 그 아들로부터 태어난 손주들의 천진난만한 미소. 그들의 얼굴은 빛의 조각으로 형상화되어,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났다. 항상 죄송스러웠던 부모님, 평생을 함께했던 죽마고우의 웃음소리도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죽는 순간까지 나에게 충직했던 보좌관 아트로(Atro)도 생각이 났다. 죽기 전 바로 그 순간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하얀 머리칼이 드문드문 섞인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