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클래스(Second Class)

2. 선택자, 박 한 (2-6)

Bluehepcat 2024. 11. 27. 16:51

6) 신인류 --------------------------------------------------------------------------------------------------

 

“그러니까, 지금 당장 너를, 아니 그 뭐냐, 니 나노로봇들을 내 몸 여기저기 심어야 한다는 거 아냐?”


나노로봇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몸 여기저기에 나노로봇을 연결해야 한다는 헛소리를 해댄다. 신라호텔 내에 있는 라연 레스토랑의 '신라'라는, 한 끼 27만 원짜리 식사를 룸에서 먹고 있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괜한 잡소리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심는 게 아니라, 보강입니다. 주인님 몸 중 약한 부분들을 보강하는 거죠. 척추, 뇌, 내장 주변은 필수입니다. 물론, 몸 여기저기 안 좋은 곳은 나노로봇 치료로 세포 재생을 하겠지만, 재생만으로 안되는 부분들은 역시나 나노로봇으로 보강해야 하구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가지고 계신 워리워 플랫폼 성능을 10%도 쓸 수가 없습니다."

“야, 그게 그거 아니냐? 신체 주요 부분을 세포 단위에서 나노로봇과 결합한다는 거 맞지 않아?"

"아니라니까요. 결합이 아닌, 보강입니다!"

"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해도 결국 내가 사이보그가 된다는거잖아 그러니까, 한마디로 니가 내 몸에 달라붙겠다는 거잖아.”

"맹세컨데 아닙니다.'

"로봇이 뭔 맹세냐.. 아무튼, 그럼 보강이 되었다가 다시 원위치도 가능한거야? 단순 보강이니까 보강재인 너를 빼서 순수한 나로 돌아갈 수 있냐고."

"가능하긴 합니다."

"가능하긴? 뭔가 찝찝한데?"

"가능합니다."

"너 또 수작부리는 거 아냐? 그럼 왜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주인님께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느정도 안정이 되시면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찝찝해! 아무것도 아니면 안정이 안된 상태에서도 그냥 말하면 되는 거잖아."

"찝찝하셔도 하셔야 합니다. 제 말 들어서 손해본 적 있으세요?"

"지금까진 없지. 하지만 이게 다 지금의 합체를 위한 길드업이었다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욧! 현재의 몸으론 가속 이동이나 근력 운동에 제한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빠르게 이동하더라도 혈관이 다터져 죽어요. 일정 이상의 힘을 쓰려고 해도, 힘줄이 다 끊어진다고요.”

"아, 잠깐만! 우리 이미 그 융합 비슷한 거 하지 않았나? 첫 경험은 이미 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주인님을 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습니다. 주인님의 신체 능력 활성화를 위해서 최소한의 나노로봇들이 주인님 주요 부위를 보강한 것입니다. 몸 전체에 대한 나노로봇의 보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순간 입맛이 싸늘하게 식었다. 전복 비빔밥 숟가락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출근길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한 동안 밖을 멍하니 바라본 한은 자리로 돌아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았다. 냉채, 왕우럭조개찜, 신선로, 구절판...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메뉴였다. 이런게 27만 원짜리라니. 27만원이면 예전 그의 한 달 식비보다도 많았다.음식들 옆에 놓인  영수증을 슬쩍 들쳐보았다.

 

‘부가세랑 서비스차지 해서... 32.4만 원? 27만원이 아니고? 이 호텔 쉐끼덜 진짜 봉이 김선달 뺨을 왕복으로 때리겠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어마어마한 부가 집중되고, 그들의 어마어마한 낭비가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다 까발려져 있지만, 소득 하위 4-50%의 사람들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이 극도의 불평등한 세상에서 아무도 불평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혁명을 꿈꿨던 이상주의자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우리 모두는 참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좋아. 니 말이 맞다 치자. 내 손상된 몸을, 게다가 유전자까지도 치유하는 것도 좋고, 만성적인 녹내장과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고쳐지는 것도 좋고, 전체적인 육체 능력을 엄청나게 향상시킨다는 것도 정말 좋아. "

“그렇죠! 얼마나 대단한 혜택입니까.”

“근데 안 하고 싶어.”

“아니 왜요?”

"생각해 봐. 얼굴과 몸이 20대로 바뀌면, 마누라와 아들을 어떻게 다시 보냐? 나노로봇으로 다시 지금처럼 나이들어 보이게 하는 거는 5분 이상은 안 된다며? 그럼, 아들을 5분만 보고 뛰쳐나와야 해?, 젊어지는 거는 좋다 이거야. 좋은 정도가 아니라 누구나 소망하는 꿈같은 일이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인간관계를 다 끝내야 할 수도 있는데, 그게 쉽게 결정이 되냐?" 

“근데 젊어지는 건, 누구나 원하는 거잖아요. 얼굴과 몸이 40대 쭈글이에서 20대 탱탱이로 바뀌는 것만으로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납득이 안되는데요?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

"사람 마음이란게 그렇게 딱 이해가 되고 그러는 게 아냐. 그럼 우선 정리해야 할 일들부터 깨끗이 정리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께. 지금은 해야 할 일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지금은 너와 합체할 생각이 전혀 없어.”

"합체가 아니라 보강입니다."

"닥쳐!"

 

다시 전복 비빔밥에 숟가락을 들었다. 이 전복이 들어간 비빔밥이 이렇게 맛있는지 정말 몰랐다. 전복도 꽤 크다. 모든 음식이 정갈했다. 나이가 들고나서 소화력이 좋지 않게 되어, 이런 것을 먹을 때마다 30번 이상 씹어서 먹었어야 했다. 지금은 그냥 씹지도 않고 흡입하고 있다. 20대의 소화력이 되돌아 온 것이다. 가장 건강했을 때에의 20대로 몸이 되돌아 온 것이다. 이제 점심은 중식으로, 저녁은 호텔 일식으로 먹어 볼 생각이다. 몸이 이렇게나 좋고 돈도 이렇게나 많으니, 눈과 입이 하루종일 호강이다.

 

“근데 말야. 넌 왜 그렇게 졸라대냐? 죽어도 내가 죽는 거지, 니가 죽는 건 아니잖아.”

“저도 죽을 수 있습니다.”

“헐. 무슨 로봇이 죽어.”

"죽을 수 있다니까요!"

"그냥 다른 놈이 널 소유하게 되는 거잖아. 아~~~ 너의 고유 의식이 딴 나노로봇에 흡수될까봐 걱정하는거냐?"

“저는 인격체입니다. 흡수당하면 정체성이 사라질 위험이 큽니다.”

 

아, 이거 의외로 심각한 놈이었구나. 갑자기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럼 얼굴만 유지하면서 몸을 강화할 방법은 없어?”

“없습니다.”

“어휴, 없는 게 왜이렇게 많아?”

“제가 만능은 아닙니다."

"하여간 말은 절대 안져요."

“어쨌든 내 맘에 들을만한 대안을 내 놓으란 말야. 아들 놈은 계속 봐야 할 거 아니냐?”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말씨름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에서 공격 받을지 몰라요. 지금 상태로는 백전백패입니다. 지금처럼 여유가 있을 때 신체 보강을 한 뒤에, 빡세게 신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 상태로는 레어급 나노로봇이 와도 질 수 있습니다. 죽을 수 있다구요.”

 

'분명 이 놈도 나와 크게 엮여 있다. 내가 죽으면 저 녀석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는 거다. 저렇게 신체 보강을 해야 한다고 하루종일 졸라대는 것을 보면, 원하는 무엇인가가 분명 있다. 하지만 진짜 속 이야기를 해주진 않을거다. 그래도 쉽게 저 녀석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다. 내가 내가 아닌 것이 되는 것 같아서 진짜 하기가 꺼려진다.'

 

“따로 원하는 것은 진짜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님 머릿속 의문을 해소시켜드린다면, 제가 다른 나노로봇에게 흡수당하면, 저라는 인격체는 그쪽 나노로봇에 흡수되어 소멸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저도 인공이긴 하지만 생명체인지라 최우선적으로 살아남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습니다. 물론 주인님과 제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주인님을 구하는 것으로 프로그래밍 되어있으니 제가 배반 때릴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구요”

“그럼 니가 살아님기 위해 나를 강하게 해야 한다는 거냐? 뭔가가 빠진 것 같은데..."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뭐, 더 이상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거지? 알았어. 그래도 무슨 일이 있던지 간에 나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그거 하나는 참 좋네.”

“네. 하지만, 주어진 여건 하에서 저 또한 최대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실행합니다.”

 

귀여운 용의 모습을 하고는 근엄해 보이는 저음의 목소리로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하니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엄청 똑똑한 운명공동체의 조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한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회사 생활 20여년을 하면서 얻은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그래. 커피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 녀석 점점 더 나를 닮아가는 것 같다. 미치게 아픈것 아닐까? 혹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남았다. 진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크게 생각하자. 개죽음을 당하느니 아들 녀석을 매주 5분씩이라도 보는 게 더 낫다. 아들이랑 1시간 넘게 같은 공간에 있으면 많이 피곤하긴 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한은 모두 접어두기로 했다. 결국 아이 말대로, 살아남는 게 최우선 아니겠는가?

 

“자~~ 시작합니다!”


아이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한은 깊이 한숨을 내쉬고, 나노로봇을 받아들였다. 그 수많은 작은 존재들이 한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몸 안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곧,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우... 시팔, 역시 하지 말 걸!”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이건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신경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눈 앞이 깜깜해졌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다행히 깨질듯이 아팠던 머리의 통증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하게 돌아왔다. 온 몸의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 다시 편히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 죽다 살아난 느낌이 이런 것일까?

 

침대 옆에 시선을 돌린 순간, 한은 깜짝 놀랐다. 침대 시트 위에 흘러내린 건... 자신의 털과 피부 각질이었다. 탈피를 한 것처럼, 한 겹의 껍데기를 벗어놓은 상태였다.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통증 대신 힘이 넘쳤다. 마치 헤라클레스가 된 것 같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눈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헬스장 포스터에서나 보던 근육질 몸. 넓어진 어깨, 탄탄한 복근, 팔뚝의 굵은 힘줄까지. 몸 전체가 완전히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한은 거울 앞에서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봤다. 이두근을 살짝 들어 보이고, 복근을 자랑하듯 긴장시켰다. 어깨에서 팔까지 이어지는 완벽한 라인. 진짜 모델이라도 된 듯했다. 몸이 전체적으로 더 커진 것 같았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주름 하나 없는, 대학 시절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웃고 있었다. 진짜 꿈은 아니겠지?

 

하지만... 이상한 이질감이 밀려왔다. 겉모습은 완벽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이젠 순수한 인간이 아닌, 사이보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강해졌다. 신인류로 재탄생한 느낌.

 

'이제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잖아.'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돌아갈 이유도 없다. 살아남기 위해선, 이 정도 타협은 필수 아니겠는가.

 

새벽 5시 40분, 한은 눈을 떴다.

 

혹시 꿈이었나? 혹여 꿈이었으면 얼마나 큰 상심을 할 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두려움 속에서 나노로봇 아이를 조용히 불러보았다. 순간, 작은 용 하나가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났다. 역시나 꿈이 아니었다. 한순간 안도감과 행복감이 물밀듯이 다가왔다.

 

나노로봇을 받아들인 후에는 이빨을 닦지 않아도, 세수를 할 필요도 없다. 나노로봇이 매 순간 몸 전체를 완벽하게 관리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은 뜨거운 물을 틀어 샤워를 했다. 그는 샤워를 정말 사랑한다. 촉감이 좋은 호텔 수건으로 대충 닦았다. 자동으로 팬티와 언더셔츠가 입혀졌다. 

 

샤워를 마친 후,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도심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분주했다. 고요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동차와 건물의 불빛들이 도시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은 휴대폰을 꺼내, 우의 어린 시절 동영상을 재생했다. 작은 화면 속에 웃고 떠드는 우의 모습이 가득했다. 몇십 번, 몇백 번을 봐도 지겹지 않은 장면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돌아갈 수 없는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정말... 다시는 못 돌아가는 건가.'

 

한은 깊은 생각 끝에, 아이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역시 죽는 게 최선이겠지.

 

아니, ‘죽는 척’ 하는 것이. 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꾸며야, 모든 게 깔끔해질 것이다. 유산으로 주면 다른 선택자들의 추적이 쉽지 않을 것이다. 보험금과 유산을 가족에게 남기면 된다. 계획은 간단했다. 100억의 예금과 100억의 보험금을 유언장에 남기고, 이를 나누는 것이다.

  • 0%는 경과 우에게.
  • 나머지 30%는 어머니와 형에게 반반씩.

이 정도면 깔끔하겠군. 아이에게 부탁하자, 나노로봇은 순식간에 100억짜리 보험을 만들어냈다. 말만 하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처리됐다. 디지털로 생성된 보험증서는 뚝딱! 아이의 손에서 완성됐다.

 

현재 가지고 있는 현금과 무기명 채권은 로펌을 통해 문경새재 라마다 호텔 최상층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안전하게 보관하면 된다. 그곳은 아무도 쉽게 접근할 수 없으니, 최적의 장소였다. 그런데... 그 돈으로 뭘 하지?

 

아이의 능력을 보면서 한은 새삼 감탄했다. 보험 가입, 로펌 계약, 호텔 매입까지 모든 일을 단 몇 분 만에 완벽히 처리했다.

참 편하긴 한데...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만 간다. 아이가 모든 걸 손쉽게 해결해줄 때마다, 마치 자신의 통제권이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점점 더 위험해지는 것같은 이 기분은 그냥 인간으로서의 질투일까, 아니면 인간만이 가진 직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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