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현금 300억 -------------------------------------------------------------------------------------------
한은 한남동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했다. 중간중간 CCTV를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7개의 CCTV와 저장장치를 해킹해 고장 내야 했다. 찍힌 영상만 지우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것보다는 일정 시간대의 모든 CCTV를 고장 내는 게 훨씬 더 안전하단다.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더 이상의 설명은 듣지 않고 그냥 믿기로 했다. 아이맨!
곳곳에 깔린 CCTV 보고 있던 한은 갑자기 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났다.
'CCTV 없는 곳이 없네! 세상이 완전 감시의 바다잖아. 최상위 지배 계급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손쉽게 감시할 수 있는 사회가 이미 만들어져 있다니. 이렇게 되면 결국 지배 계급의 선의에만 기대는 수밖에 없잖아? 이건 너무 위험해. 만약 그들이 딴생각이라도 하면, 일반 서민들은 바로 끝장나는 거지. 법으로 제약한다고 해도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다. 게다가, 사법조직마저 썩어버리게 되면? 그땐 진짜 답도 없다. 아니, 사법계층이 썩지 않더라도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서로 소통하고, 그 안에서만 산다면? '법대로 했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만 이익을 챙긴다면... 끔찍하다. 결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건전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회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유토피아가 가능할까?'
혼자 생각하다가 한은 피식 웃었다. 사회 정의, 유토피아,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자신은 지금 수백 억짜리 현금을 털러 가고 있지 않은가? 도둑질하러 가는 주제에, 사회정의를 생각하고 있다니. 이런 개상또라이가 또 어디있단 말인가?
'또라이 아니십니다. 누구나 여러 인격을 품고 있습니다. 한 쪽은 고결한 생각을 하고, 다른 쪽은 저열한 계획을 짜는 것이 사람입니다.'
'닥쳐. 내 머릿속에 들락거리지 말라고 했지? 한 번만 더 그러면... 그냥... 에이, 아무튼 다신 그러지마라! '
사이비교주 곽활규 집에는 294개의 CCTV와 1,091개의 동작감지기가 설치돼 있었다. 다들 값비싼 외산 장비들이란다. 얼마나 뒤가 구리면 이 정도로 해 놨을까? 이 정도면 천하의 괴도 루팡도 입구 컷을 당할 것이다.
한은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보안 체계가 완벽할수록, 그것을 무너뜨렸을 때의 효과는 더 강렬하기 마련이다. 완벽함 속에서 자만하던 이들이 한순간에 멍청이로 전락하는 순간을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한은 지난 한 달간의 CCTV 영상을 분석해 평온한 저택 내부의 가짜 영상을 경비실 모니터에 띄웠다. 27명의 경비원과 15명의 하인들도 각자의 패턴이 분석되어, 유령처럼 움직일 수 있는 이동 동선이 제시되었다. 동선에만 따라 이동하면 그들은 절대 한을 볼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걸릴 확률이 0%? 이게 진짜 말이 돼?’
‘말이 됩니다.’
'막 이렇게, 이렇게 움직여도?'
'소리만 안내시면 가능합니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지만, 경비원과 하인들의 움직임을 분석해 100%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니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는 일주일간의 데이터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게 바로 빅데이터란다. 진짜 그럴까? 진짜 그렇단다. 진짜 재수없다.
한의 눈앞에 집 전체의 구조가 투시도로 펼쳐졌다. 큰 금고 2개와 작은 금고 1개가 있는 곳이 반짝거린다. 금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아이의 말에 한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다 아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아는거야?
2층의 개인 서재에 있는 작은 금고는 정말 중요한 것들을 보관하고 있단다. 여기에는 상류층 놈들의 민낯이 담긴 치부책과 비밀 장부, 뇌물 리스트가 있단다. 궁금해서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 씨팔....위에서 힘 좀 쓰는 놈치고 썩지 않은 녀석이 거의 없다. 유명한 녀석들도 꽤나 있다. 썩어빠진 얼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언론계까지 다 썩어버린 마당이니 놀랄 일도 아니다.
한은 사이비 교주가 애지중지하는 그 잡스러운 것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치부책을 언론에 보내서 정의를 실현해버려? 그런 건 정의감 넘치는 영웅들이나 할 일이다. 한은 그저 깔끔하게, 오로지 돈만 가져가면 만족이었다. 뭐, 이 교주라는 양반도 찔리는 게 많으니, 백억, 이백억 빠진다고 경찰을 부르진 못할 것이다. 아주 완벽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르자, 한은 혼자 또 픽 웃고 말았다. 지금 자신은 슈퍼맨보다 더 큰 힘을 가져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경찰이 올 것을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깟 경찰들이 슈퍼맨이 된 자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전히 월급쟁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정신차리자. 경찰, 아니 군대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좀 더 자신있게 훔치자!
한은 어렵지 않게 지하 1층 금고 앞에 도착했다. 여기에 돈다발이 무지 많이 있다. 한 층 더 내려가면 더 큰 금고가 있는데, 거기엔 값비싼 골동품과 그림, 보석 같은 것이 있단다. 이 교주 놈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거야? 골동품이나 보석은 부피도 너무 크고 또 되팔아야 해서 패스다.
금고는 거대하고, 검은색 금속으로 반짝였다. 티타늄 합금에 두께가 50cm? 아이, 넌 대체 모르는게 뭐냐? 이런 쓸데없는 정보는 또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금고의 견고함은 확실히 남달라 보였다. 게다가 최첨단 전자패널은 마치 '나 엄청 대단하지? 아무도 못 열걸!'이라고 외치는 듯 보였다. 그래봐야 닝겐이 만든 전자 장치 장난감에 불과하다.
한은 속으로 킥킥거리며 조용히 외쳤다.
'열려라, 참깨.'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양이 형상을 한 나노로봇이 금고를 향해 앞발을 척 얹었다. 그 순간, 전자패널이 번쩍이며 금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역시 고급 금고답게 문 여는 모습조차 우아했다.
금고 안은 방 하나 크기였다. 5-6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공간에 고급 은빛 선반들이 줄지어 있고, 그 위에는 무기명 채권, 달러 뭉치, 현금다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처음엔 딱 100억만 가져가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가져가야 티도 안 나겠지.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돈의 산을 본 순간,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썩어빠진 돈, 안 가져가면 어차피 어디 악한 일에 쓰일 것이다. 차라리 다 가져가는 게 사회정의에 더 부합할 것이다.. 이 빌어먹을 놈의 교주도 이 정도 돈이 없어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다. 한은 웃으며 돈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한은 금고에서 달러 50억, 한화 100억, 무기명 채권 50억을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가방에 돈을 담다 보니 문득 걱정이 되었다. 이걸 다 들고 나갈 수 있을까? 눈에 띌 만한 양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못 가져가면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다 가져가야만 한다. 그때, 나노로봇 아이가 역시나 현명한 제안을 내놓았다.
'달러 120억 어치, 한화 30억, 그리고 무기명 채권 50억으로 축소하면 어떨까요?'
'그건 얼마나 되는 거지?'
'달러는 125묶음, 한화는 600묶음입니다. 총 72.5kg으로, 여행용 가방 두 개와 백팩으로 나누면 됩니다.'
순간 한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그리고 그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나노로봇이 다 알아서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메고 있던 백팩과 옷, 심지어 신발에서 나노로봇이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30kg짜리 여행용 가방 두 개로 변신했다. 동시에 일부 나노로봇이 여러 개의 손으로 변신하여 금고 안의 돈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마치 관세음보살의 천 개의 손처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건 예술이다, 예술! 한은 감탄하며 그 장면을 바라봤다. 여행 가방 두 개는 금방 가득 찼고, 남은 돈과 무기명 채권 50장은 백팩에 채워 넣었다.
여행용 가방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이런 대저택들이 즐비한 동네에서 차도 없이 여행용가방을 들고 이동을 한다고?
'이걸 들고 어떻게 빠져나가지? 차로 변신은 안 되냐?
'불가능합니다. 주인님께서 보유한 나노로봇 양으로는 무리입니다.'
'그렇다고 이 여행용 가방을 들고 버스나 지하철 탈 수는 없잖아?'
'카카오택시를 호출하시면 됩니다. 대로변까지만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시면 됩니다.'
‘이 큰 여행가방 들고 안 들킬 수가 있냐?’
‘눈 앞 화면에 보이시는 이동 동선에 따라 이동하시면 가능합니다.’
'뭐.... 사실 들켜도 상관은 없겠지. 누가 우릴 잡을 수 있겠어?'
“네. 사실 들켜도 상관없습니다. 주인님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이 근처엔 아무도 없습니다.'
"역시 그렇지? 나 너무 겸손한거 같아. 아직 네 능력에 익숙하지 않아 그런가?'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사이비 교주의 주택을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주차장을 지나며 입고 있던 옷이 또 변했다. 반팔 티셔츠, 반바지, 그리고 명품 슬리퍼로 바뀌었다. 전신을 명품으로 무장한 한은 나노로봇 아이가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명품 취향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경비원과 하인 42명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최첨단 보안시설도 아무 일 없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돈을 도둑맞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더라도, 범인이 누군지, 어떻게 범행이 이루어졌는지는 절대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한은 주차장을 지나 대로변으로 이동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방 두 개는 비록 나노로봇의 걸작이라지만, 부피와 무게만큼은 여전히 현실적이었다. 백팩까지 매고 있으니 딱 봐도 여행자라기보다는, 이삿짐 센터 직원 같아 보였다. 명품을 입으면 뭘하냐고. 길가에 나서자마자 한은 스마트 안경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카카오택시, 호출.'
잠시 후, 안경 화면에 가장 가까운 택시의 위치와 예상 도착 시간이 표시되었다.
'4분... 빨리도 오네. 근데 이렇게 거대한 가방 두 개를 보고 택시 기사가 의심하진 않겠지? 택시 기사가 수상하다면서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어쩌지?'
'그럴 확률은 낮습니다. 게다가 신고해도 경찰이 주인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뭐, 그건 그렇지. 그래도 택시 기사한테 수상한 놈이라고 찍히는 건 좀 찜찜한데.'
'알겠습니다. 택시에 탑승하면 주인님의 모습이 기사님께 친절한 여행객으로 인식되도록 시각 이미지를 조정하겠습니다.'
'뭐야, 이제는 마법까지 부리는 거냐?'
'마법이 아니라 기술입니다.'
'기술이라… 네가 있으면 불가능한 게 없겠네.'
잠시 후, 은색 택시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 가방 두 개를 본 기사가 살짝 놀란 듯했지만, 얼굴에는 곧 친절한 미소가 번졌다.
“짐이 많으시네요. 여행 가세요?”
택시 안에 앉자 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팩은 옆에 두고,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택시 타는 데까진 성공. 이제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면 돼. 나노로봇이 속삭이듯 말했다.
'목적지까지 이동은 문제없습니다. 이동 경로의 모든 CCTV를 이미 분석해 두었습니다.'
'역시 대단해. 그럼, 혹시 기사가 내 돈을 눈치채고 튀려고 하면 어떡하지?'
'저희가 그걸 허용할 가능성은 0%입니다. 운전기사의 근력양으로 보았을 때, 여행가방을 훔칠 시도도 하지 못할 겁니다.'
'허, 이제는 너한테 말도 못 걸겠네. 뭐든 다 알아버리니까.'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보며 한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건 정말 역대급 완전범죄다. 할렐루야! 한은 차창 밖의 평화로운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이 돈으로 내 세상을 만들어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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