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클래스(Second Class)

2. 선택자, 박 한

Bluehepcat 2024. 11. 14. 10:56

2) 나노로봇 아크로포스 -------------------------------------------------------------------------------

 

지금까지 한이 파악한 나노로봇 아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전체 크기는 평범한 성인 정도지만, 이 로봇은 사실 거대한 "쌀알 무리의 나노로봇들"로 이루어져 있다. 놀랍게도 이 쌀알들은 그냥 쌀알이 아니라, 인류가 상상도 하지 못할 양자 컴퓨터 능력을 가진 나노로봇들이다. 각각 쌀알만한 마이크로 로봇이지만, 다 합치면 하나의 ‘나노로봇 아이’라는 개체가 된다. 그리고 충격적인 건 쌀알만 한 그 로봇 안에도, 또 쌀알보다 더 작은 미세 나노로봇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도 아니고...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가장 작은 미세 나노로봇들은 머리카락 굵기의 5분의 1 크기(약 20㎛)로, 각자 독립적인 판단 능력과 이동능력을 탑재하고 있다. 개별 나노로봇들이 모인 나노로봇들도, 예를 들어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나 주먹만한 크기의 나노로봇 개체도 ‘나노로봇 아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 작은 친구들은 혼자서도 움직이고, 다 같이 모여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귀여운 용이나 강아지처럼 변신할 수도 있고, 필요할 때는 인간이 착용 가능한 슈트나 안경 같은 장비로도 변신이 가능하다.

 

위급 상황이 되면? 바로 "나노 슈트" 형태로 변신하여 주인, 즉 선택자 ‘한’에게 착용되어 신체능력을 엄청나게 강화시켜준다. 이때는 거의 슈퍼히어로 모드다. 한이 가지고 있는 나노로봇 아이는 "워리어 플랫폼"이란 장비형 나노로봇으로, 전 세계에 딱 100개만 존재하고 있는 최상위 유니크급 레벨의 장비다. 참고로 이 ‘장비형’ 나노로봇은 무기형, 인간형, 수인형 나노로봇보다 상위라는데, 그 이유는 아이도 모른단다. 뭐, 유니크한 거니까 그런 거겠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스터리! 나노로봇 아이 조차도 자신을 누가,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전혀 모른다. 외계인들이 ‘새로운 지구를 정복하라’고 남긴 작품일 수도, 아니면 고대 지구인들이 만든 유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악마의 유혹이라면 버릴 것인가? 이런 요술램프 같은 능력을 버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펑”

 

갑자기 귀여운 작은 용 하나가 한의 앞에 나타났다. 나노로봇 아이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바뀔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한은 아이를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시켜 보았다. 아이, 정확히는 나노로봇 아이는 처음엔 얌전히 따라줬다. 좀비, 드라큘라, 외계 생물체, 심지어 해파리까지 변신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내 짜증 난 듯 말했다. '주인님, 진짜 이러기 싫은데요.' 하지만 나노로봇은 주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아니면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AI의 숙명인 셈이다.

 

한은 아이가 내심 거부감을 보이는 것을 보고 흥미가 더 동했다. '그러면 네 마음대로 변신해봐.' 한이 쓱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곤 곧 변신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고작 귀여운 강아지?' 한은 적이 실망했다. 그래도 나노로봇  아이 스스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한은 나름의 법칙을 깨달았다. 아이는 절대 주인이 싫어하는 모습, 예를 들어 뱀, 박쥐, 바퀴벌레 따위로는 변하지 않았다. 주인의 성향에 맞춘 '안전한' 변신만 하는 것이었다.

 

웃기는 것은 이런 변신 기술도 유니크급이라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심한 부가기능을 쓰는 데도 등급이 필요하다고? 나노로봇 세상도 참 기묘하다.

 

“야! 내가 항상 말하고 나타나랬지? 이렇게 불쑥 나타나면 심장마비 걸린다니까?”

"주인님 심장은 제 나노 분신들이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어서 문제 없습니다. 총알도 튕겨냅니다."

“얘는 진짜로 다 다큐로 받아들인다니까. 그런데 또 왜?

“주인님, 인터넷 해킹하시면 안 된다고 말 했어요? 안했어요? 우리 위치가 노출된다고욧!

“귀여운 여자 목소리로 전환!

“장난하시지 마시고, 지금 바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아이의 목소리가 귀여운 여자 목소리로 바뀌었다.

 

“섹시한 여자 목소리로 전환!

“주인님, 진짜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니라니까욧!"

"흥 넘치는 여고생 목소리로 전환!"

"긴급상황 발생! 나노로봇 자동모드로 전환합니다.

 

갑자기 귀여운 여고생의 목소리가 나노로봇의 모드 전환을 알렸다. 자동모드는 주인이 말을 안 들을 때 나노로봇이 사용하는 최후의 비책이었다. 이 모드가 되면 나노로봇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지 않고, 필요에 따라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물론 자동모드 해제 권한은 주인에게 있다. 언제나 주인의 명령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설사 나노로봇 자신을 파기하라거나 주인 본인을 죽이라는 명령일지라도 따라야만 한다.  로봇 3계명은 소설 속 얘기일 뿐이다. 문제는, 자동모드의 기능과 해제 방법에 대해 주인 한에게 아직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어어~~? 야! 내 몸을 왜 네가 마음대로 움직이냐? 멈춰, 당장 멈춰!”

 

한은 겉으로는 짜증이 났지만 속으로는 연신 감탄을 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데,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입고 있는 워리어 플랫폼이 알아서 몸을 끌고 가는데, 마치 자신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움직일게. 어디로 가면 되는데?”

“35미터 전방에 오토바이 한 대가 있습니다. N248 포인트까지 2분 14초 내에 도달해야 합니다.”

 

한의 눈앞에 갑자기 거대한 내비게이션이 반 투명으로 펼쳐졌다. 안경 같은 별도의 장비 없이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다. ‘구글 안경이 이렇게 되려면 얼마나 발전해야할까? 대체 이 나노로봇의 기술 수준은 도대체 어디까지인 거지? 대체 누가 왜 만들었을까? 정말 궁금해 미치겠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생겼지만,  아이는 이런 질문에는 철저히 침묵했다. 여러가지 질문들을 다양한 각도로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인공지능 답지않게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복종을 하는 것이 나노로봇 특징이라고 입이 닳도록 말해놓고는, 이런 것에는 바로 쌩을 까버린다니! 어쩌면 절대 복종이란 것도 어떤 제약 조건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나노로봇 자신도 진짜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모르면 더 걱정이 쌓인다. 이 전지전능한 나노로봇을 바보 멍텅구리로 만들어 버리는 창조주의 능력을 감히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고민은 그만하자.언젠간 이 모든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우선 아이 말을 따르고 보자. ‘음, 목적지가 스타벅스 방배점이란 거지? 오케이, 가자!’

 

한은 머릿속으로 아이와 대화를 하며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아이는 오토바이에 대한 정보를 홀로그램으로 보여주었다. ‘오, KTM 슈퍼듀크 GT? 이름부터 포스가 장난 아닌데?’ 오토바이  크기와 중량, 최대토크와 속도 등 상세한 정보가 눈 앞에 나타났다. 가격표를 보니 3천만 원이 넘었다. 운전자가 바로 옆 사무실에서 여직원과 웃고 있는 모습도 실시간으로 3D 영상으로 보여졌다. 오토바이 주인이 있는 곳의 컴퓨터들과 CCTV들을 모두 해킹해 실제와 같은 3차원 영상을 만들어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가죽자켓과 가죽바지가 퉁퉁한 살 때문에 찢어질 듯이 팽팽해 보였다. 오토바이가 꽤나 힘들어 보일만큼 덩치가 컸다.

 

"이거 훔치다가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겠는데? 주인 덩치가 말도 안 되게 크네?"

"걱정 마세요, 주인님. 손가락 하나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요."

"니가 내곁에 있어서 정말 든든하다."

 

한은 오토바이를 운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 그런 것을 운전하는 것도 싫어했다. 오토바이는 까딱 잘못 운전하면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있었다. 어렸을 때 50CC 스쿠터 뒤에 탔을 때에도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겁이 엄청 났었다. 떨떠름한 마음으로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았다. 그러자 오토바이 운전과 관련한 막대한 데이터가 순식간에 한의 뇌와 근육에 전송되었다. 그 정보들은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그의 뇌와 온 몸의 근육에 바로 각인이 되었다. 이제 한은 웬만한 프로 오토바이 선수보다 뛰어난 라이더가 되었다.

 

"오우~~~ 지져스! 왠지 이 오토바이랑 수 십년을 함께 해온 것 같은 친밀감이 밀려오는데? 아이,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 어떤 것들도 이렇게 다 다룰 수가 있게 되나?"

“가능은 하죠.”

“‘가능은’? 그럼 안 되는 것도 있어?”

“당연하죠. 정보는 무제한이 아니에요. 등가교환의 법칙! 아주 많은 양의 정보를 한꺼번에 쏟아부으면 몸에 엄청 무리가 갑니다."

“어우, 무슨 강철의 연금술사냐? 정보를 천천히 옮기면 되잖아? 양이 많으면 일주일에 나눠서 받으면 되지."

"데이터가 끊기면 원래의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한 덩어리의 데이터를 한꺼번에 받아야만 온전히 그 능력을 전수받으실 수 있어요."

"어렵다. 어려워. 암튼 지금 괜찮은 거 같으니까. 다음 번엔 비행기하고 헬기 조종술도 좀 알려줘."

"이번 거는 데이터의 크기가 그나마 작으니까 데미지가 적은 겁니다. 에휴~~ 말로 해봤자 모르실테니, 다음 번에 비행기 조종 정보를 전송해드릴께요. 진짜 고통이 뭔지 알려드릴께요."

"어우야~~ 니가 정색하고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무섭다."

"무서우라고 이야기 드린 겁니다. 아무튼 출발하시죠."

 

나노로봇 아이가 자동으로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전자기계는 순식간에 해킹하고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걸까? 한은 오래된 라이더처럼 오토바이를 능숙하게 몰았다. 조금 익숙해지자 겁도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엑셀을 좀 더 잡아당겼다. 서울 시내에서 시속 150킬로미터로 빠르게 질주했다. 주변의 차들이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한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속도감에 짜릿함을 느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처음 맛보는 속도감이 온몸을 전율시켰다.

 

'유니크 나노로봇은 정말 강하다며? 니가 전 세계에 딱 100개만 배포된 한정판이라고 했잖아? 그럼 대충 계산을 해봐도 이 조그만 나라에선 나 혼자 있을 가능성이 크잖아? 그렇다면 내가 제일 강한 거 아닌가?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오만가지 난리를 치며 도망다니고 있는 걸까?  와~~ 내가 말했지만 진짜 논리적이지 않냐?'

'에휴... 또 설명해야 하나요?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유니크 전 단계인 에픽급 나노로봇이 전 세계에 대략 1만 개 정도 뿌려졌습니다. 물론 네트워크에 등록안한 나노로봇을 포함하면 더 많아지는 것은 감안해야 합니다. 여기 대한민국에는 대략 600개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에픽 나노로봇 2~3개를 성공적으로 흡수하면 유니크급이 될 수 있으니까,  600개의 나노 로봇 중에서 흡수 시도를 한 개체를 대략 40%로 정도로 보수적으로 잡고, 흡수 성공률도 대략 40% 정도라고 보수적으로 보면 이 나라에만 대략 96개의 유니크급 나노로봇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건 최악의 경우잖아! 솔직히 이 좁은 곳에서 96개는 에바 아니냐?'

'좋아요, 그럼 확실한 데이터로 이야기할게요. 실제로 이 조그만 나라에서 유니크 나노로봇급으로 의심되는 에너지 흐름이 13개나 포착됐습니다. 그중 1~2개만 진짜 유니크라고 해도,  그리고 그 유니크 나노로봇이 에픽 나노로봇 1-2개를 흡수해서 업그레이드가 된 유니크 등급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선택자가 새로운 업그레이드를 위해 주인님같은 유니크 선택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면!' '

'알았다, 알았어. 너 정말 잘났다. 그래서 지금 니 말대로 도망가고 있잖아. 근데 너 비관적인 건 인정해라.'

'인정하는 게 주인님께 중요한 사항이라면 인정하겠습니다. 다만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하지 마! 오늘 니 독하디 독한 카산드라의 예언을 너무 많이 먹어서 머리가 띵하다'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 합니다. 하루빨리 에픽급 이상을 흡수해서 업그레이드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업그레이드 된 유니크 나노로봇이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 주인님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적에게 저를 빼앗기게 될 겁니다. 아니 100% 빼앗깁니다. 그리고 그냥 뺏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때는 주인님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어휴, 너는 왜 그렇게 분위기 망치게 말하냐? 좀 부드럽게 못해?'

'제 문답 메카니즘은 주인님 성향에 맞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꼬박꼬박 말하는 뽄새봐라.... 에휴, 차라리 니가 내 주인해라." 

 

나노로봇은 다른 나노로봇을 흡수할 때 그 자체의 업그레이드와 함께 흡수된 나노로봇의 능력 중 하나를 얻을 수 있게되어 더 강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흡수할 수 있는 로봇의 한계가 있다. 최대 4개까지만 흡수 가능한 것이다. 커먼이든, 에픽이든, 유니크든, 어느 등급이든 할당량은 예외없이 딱 4개로 고정되어 있다. 물론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나노로봇 아이의 말처럼, 레전드급이나 유니크급 나노로봇을 손에 넣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유니크급 친구들을 잡아먹기 위해 난리를 피울 것이 틀림없다. 4개까지 흡수할 수 있는데, 더 좋은 등급의 나노로봇으로 채우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 아니겠는가?

 

레전드급 나노로봇은 유니크급보다 20~40배나 강력하다니, 이건 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사치다. 더우기 레전드급은 유니크급 보다 훨씬 더 많은 기능과 특수기술을 가지고 있단다. 레전드급이라면 상대방 나노로봇의 능력치와 특수능력도 파악할 수 있으며 근처에 있는 다른 나노로봇의 위치까지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레전드급이 근처에 있다면, 유니크 나노로봇을 가진 선택자는 그 녀석에게  맛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레전드급도 에너지 흐름을 통해 다른 나노로봇의 위치를 찾아낼 수는 있다. 등급이 높을수록 평시에도 높은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하니, 만약 주변에 거대한 에너지가 감지된다면 레전드가 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레전드가 자신의 에너지 발산을 숨기고 스텔스 모드로 은밀히 움직인다면? 알아챌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때는 레전드급의 기습 공격에 '어, 뭐야!' 하고 하늘나라로 갈 수밖에 없다. 같은 유니크급은 한이 가진 것이 상위권 레벨이라 웬만한 다른 유니크급을 만나도 '이 정도면... 뛰면 살 수 있겠지?'라는 기대를 걸 수는 있다. 하지만, 레전드는? 나노로봇 아이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성인 어른이 죽인다고 쫓아오는데 7살 아이가 도망간다고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갑자기 한의 가슴속에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이 나노로봇, 이렇게 대단한 걸 손에 넣고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열불이 난 것이다. 언제나 중요한 순간이면 꼭 어딘가에서 방해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한은 떠오르기 싫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갔다. '이런 젠장, 왜 늘 이 모양이냐.' 모든 게 잘 풀리려는 순간이면 언제나 무언가가, 누군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팔자는 정말... 하지만,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분노에 빠져 있을 시간조차 사치다. 위험에 처할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근데 잠깐, 방금 전까지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왜 위험해졌다는 거야? 좀 더 찰지게 설명해봐."

“북한 개마고원 쪽에서 비정상적인 에너지 활동이 발생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 분출이었습니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 레전드급 선택자가 새로 각성했거나. 둘, 유니크 나노로봇 간의 융합으로 새 레전드급이 탄생했거나. 셋, 레전드급끼리 한판 쎄게 붙었거나.”

“그래서, 너의 결론은?”

개마고원 사건 후 곧바로 새로운 에너지 흐름들이 세계 각지에서 폭발했습니다. 그게 다 나노로봇이라고 가정해 보면, 지금 아시아권에서 한국으로 쌩쌩 날아오는 유니크급 나노로봇만 셋이에요. 그리고 제가 잡아내지 못하는, 최상위급 나노로봇들도 올 가능성도 감안해야 합니다.”

“아니, 왜 다들 한국으로 오는 건데?”

“뭔가가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낀 선택자들이 움직이는 거겠죠. 이 모든 사항들을 종합해 봤을 때, 현재 주인님의 위험 확률이 78%로 찍혔습니다. 빠르게 현장을 이탈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제는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너 정도면 유니크 중에선 탑 클래스라고 하지 않았나?  네 능력이면 웬만한 유니크급은 그냥 발라버린다며? 워리어 플랫폼 형태의 나노로봇이 짱 쎄다고 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던 것 같은데?"

“스스로 말하긴 좀 쑥스럽지만, 네, 맞습니다. 저는 유니크 중에서도 탑 클래스입니다. 워리어 플랫폼이 다른 형태보다 강한 것도 사실이고요. 검 검이나 총과 같은 장비 또는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동물들로 변신하는 대부분의 나노로봇들은 고작 2-배의 신체 강화가 가능한 경량 나노슈트로 버티거든요. 나노로봇의 주요 능력이 형태화된 검이나 총, 또는 동물에 집중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저는 달라요. 저의 주특기인 나노슈트는 최소 5배 이상의 신체 강화가 되죠. 방어랑 공격도 일체화! 2배 강화된 인간이랑 5배 강화된 인간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답 바로 나오죠. 웬만한 유니크 급 나노로봇은 제 상대가 되기 힘듭니다.

“그럼, 옷 형태가 제일 강한거야? 아이언맨 슈트 같은 게 짱이겠네?”

“꼭 그렇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저 같은 착용하는 형태가 동급에서는 우위에 있습니다.”

“그렇게 쎈데 왜 자꾸 도망 다녀야 해?”

“또 잊으셨어요? 누누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인님의 본래 체력이 너무, 너무나도 저질입니다. 그리고 저랑 한 몸 된 지 얼마 안 돼서 동화율도 엄청 낮고요. 지금 이 상태로는 에픽급 나노로봇도 무섭습니다. 하루 빨리 체력 강화하고, 전투 훈련을 더해야 해요. 저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도 저질이라니... 너 말 좀 친다!”

 

같은 유니크급이라도 성능 차이가 최대 2배까지 난다니, 이거 참 게임 밸런스 파괴 아닌가? 게다가 나노로봇끼리 융합을 하게 되면 나노로봇 등급이 올라가고 성능 업그레이드에  운이 좋으면  보너스 특수 능력까지? 문제는 실패하면 소중한 나노로봇 하나가 그 자리에서 증발하고, 기존의 나노로봇에도 데미지가 꽤나 간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데, 왜 선택자들은 그렇게 융합을 하려고 난리들일까? 

 

융합 성공률은 나노로봇 간의 '상성'에 따라 10%에서 90%까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상성이 좋은 레전드급을 구하면 융합 도박을 걸어볼 만한데, 이 기능 덕에 선택자들 모두가 나노로봇 사냥 경쟁에 푹 빠졌버렸단다. 성능 좋은 나노로봇을 먼저 잡아서, 먼저 융합하고 강해지는 것이 작금의 상황에선 유일한 생존 전략인 것이다. 한은 다시금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노로봇을 손에 넣고부터는 이유 모를 불안감이 늘 가슴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죽음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을까? 먼저 안 빼앗으면 내 것을 뺏겨 죽는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을 다녀야 할까?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은 스타벅스 방배점 부근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았다. 아이는 오토바이를 어디에 둬야 할지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의 눈 앞에 위험 확률 24%가 표시되었다. 급박한 상황은 벗어났다는 의미였다.

 

"어우... 그놈의 위험 확률은 갑자기 나타나서 날 괴롭히냐. 불과 3시간 전에는 11%라더니? 진짜 어떻게 계산되는 거야? 정확하긴 한 거냐? 어떻게 내 위험을 확률로 계산할 수 있는 거지?"

 

한은 강아지로 변신한 아이를 품에 안고 투덜댔다.

 

"다시 설명을 해드릴까요?"

 

아, 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좀. 내가 비아냥 마스터였는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한은 전에도 아이의 설명을 들어봤지만, 아무리 들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 배경지식도 없이 생뚱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골아떨어지는 법이다.아이의 이야기는 한의 입장에서는 대부분 황당한 개소리들이었다. 아이의 강의 때마다 한은 정말 푹 잤다. 잠이 안오면 강의 하나 들으면 될 정도로 강력한 수면제였던 것이다.

 

“아니, 됐어. 그 졸리는 강의를 또 들으라고? 그런데, 너 목소리에 비아냥 끼가 좀 있다?

 

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휙 사라졌다. 한은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 CCTV가 있는지 다시 둘러보았다. CCTV 두 대가 또아리를 틀고 한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아이, 다 지워버려!’

 

한은 서둘러 명령했다. 아이는 네트워크에 잠입해 CCTV 녹화본을 싹 밀어버릴 것이다.

 

‘아이! 누가 날 봤으면 혼자서 이상한 말이나 하는 미친놈이라고 했을 거 아냐. 제발, 사라지기 전에 말 좀 해줘!’

 

한은 이제 하소연을 하기로 했다.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 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서 리어왕처럼 혼자 독백하는 미친 놈을 만들어 버렸다.몇 번이나 아이를 꾸짖었지만 주인의 말을 개똥으로 여겼다. 나노로봇 아이 말로는 나노로봇은 주인 성격을 닯아간다는데.

 

'야! 내가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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