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클래스(Second Class)

2. 선택자, 박 한 (2-5)

Bluehepcat 2024. 11. 26. 15:48

5) 신라호텔

 

한은 카카오 택시를 타고 장충동 신라호텔에 도착했다. 아이가 "신라호텔, 조선호텔, 워커힐 W호텔"을 추천했는데, 세 곳 중 가장 가까운 신라호텔로 결정했다. 큰 여행가방 두 개를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잘나가는 사업가 같이 자연스러웠다. '그 녀석의 말은 무조건 옳다'는 진리를 또 한 번 깨달았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벨보이가 바로 붙어서 환대를 한다. 마치 중동의 왕자로 착각할 만큼 극진하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지갑에서 5만 원권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좋아 죽는다. 하찮은 지폐 한 장이 많은 일을 해준다. 아이 조언대로 적당히 괜찮은 디럭스룸을 잡았더니, 체크인을 도와준 직원 역시 끝내주게 친절하다. 존중받는 느낌이 확 느껴진다.  자본주의 만세!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은 역시 돈이 최고다.

 

한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봤다. 예전에 이곳 뷔페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맛이 얼마나 끝내줬던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물론, 호텔 안의 고급 레스토랑들은 훨씬 더 비싸니 뷔페보다 훨씬 더 맛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긴 꿈도 못 꿨다. 애초에 메뉴판의 가격만 봐도 '이건 분명히 맛있을 거야, 그래야만 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가격이었다. 그 시절, 호텔 뷔페에 한 번 오는 것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몇 달치 문화생활비를 한꺼번에 쏟아버리는 기분이랄까?

 

가족과 함게 왔던 그 날을 떠올려본다. 아침과 점심을 일부러 굶으며 저녁 뷔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날이었다. 그야말로 배고픔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전투였고, 커다란 접시를 들고 음식 코너를 몇 바퀴나 돌았던 게 생각났다. 접시는 다섯 번, 아니 여섯 번 넘게 꽉꽉 채웠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중에서도 살살 녹는 소고기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손님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소고기 조각들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걸 조금만 집에 가져가면 아들도 잘 먹을 텐데. 잠시 음식을 가져갈까 하다가 서빙 직원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결국 그 생각을 포기해야 했었다.

 

이 호텔에서 하룻밤 묵는 건 한에게도 처음이었다. 방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세련된 인테리어와 어우러진 따뜻한 조명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실내 온도는 적당히 쾌적했고, 침대는 보기만 해도 폭신해 보였다. 이러니 잠이 안 올 수가 없겠군. 한은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생각. ‘돈이 있으니 이런 것도 누리는구나.’ 지금껏 해보고 싶었던 것들, 하지만 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휙휙 지나갔다. 한은 결심했다. 그래,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오직 나만을 위해 돈을 써보자!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300억.’


은행 예금 100억에 현금 200억이라니. 단순한 숫자가 이렇게 현실감 있게 느껴질 줄이야. 한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은은한 간접조명이 오크색 천장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마치 공간 전체가 한껏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감싸여 있는 듯했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엇부터 해야 하나?’

 

그는 갑자기 결단력 있게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 가방을 열었다. 한 묶음씩 가지런히 정리된 5만 원권 뭉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은 천천히 그 중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빳빳하게 눌러져 있는 5만 원권 지폐. 그 작은 묶음 하나가 무려 500만 원이었다. 놀랍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는 이어 가방 속에서 1천 달러짜리 지폐 묶음도 꺼냈다. 이 묶음 하나가 10만 달러, 한화로 약 1억 2천만 원이다. 

 

잠시 그 돈을 바라보던 한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돈 1억을 모으는 게 얼마나 힘들었더라?’ 주먹 쥐고 열심히 살았던 그 시간들, 간신히 조금씩 저축하며 미래를 꿈꿨던 자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득했다. 그러면서도 씁쓸했다. ‘그렇게 고생해 모은 돈을 이렇게 한 줌에 비교당하다니, 참 내가 찌질했구나.’ 그는 돈 묶음을 다시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하지만 지갑을 열어 빳빳한 5만 원권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100장을 넣는 건 좀 부담스러워 보여, 40장 정도를 대충 골라 지갑 속에 넣었다. 지갑이 묵직해졌다. 그 느낌이 묘하게 든든했다.

 

‘이게 뭘까? 핸드폰 속에 찍힌 100억이 내 돈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갑에 5만 원권 몇 장 들은 게 더 현실감 있게 날 안심시킨다니.’ 한은 스스로를 비웃듯 중얼거렸다.


‘인간이란 정말 어리석은 존재야.’

 

그때였다.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냥 인간이란 족속이 그런 것 같다고 잠깐 생각한 것뿐이야."

 

그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내 생각 읽지 말라고!"

“그 명령은 수행할 수 없습니다. 주인님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 쓸데없는 대화는 삼가겠습니다."

“...에휴. 말을 말자”

 

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나노로봇, 아이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결국 그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대화를 끊었다.

저녁 7시 반.

 

돈 200억을 훔쳐 이곳 신라호텔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분. 세상이 변한 건지, 자신이 변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모르겠다. 도착과 동시에 한 가지 분명해진 건 극심한 허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이었다. 한은 의아했다. 나노로봇이 몸속 모든 세포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한다고 들었고, 실제로 나노로봇을 얻게 된 이후로 식사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뱃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 도대체 이 욕구는 어디서 오는 걸까?’

 

아이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복잡한 걸 따질 필요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배를 채우는 것. 한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처음엔 비싼 고급 레스토랑에 가볼까도 했지만, 낯선 장소보다는 익숙한 곳이 편할 것 같았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뷔페라면 더 좋을 테니까. 결국 한은 신라호텔의 유명한 뷔페, 더 파크뷰로 향했다. 1인당 20만 원 정도라는 가격표가 붙은 고급 뷔페. 처음부터 지나치게 높아진 세상에 적응하려 들면 멀미만 날 것 같아 이 정도에서 타협했다.

 

뷔페에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진열된 음식들이 반짝이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던 것도 잠시, 한은 접시를 몇 번 들고 나자 금세 배가 불렀다. 먹고 싶은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간절했던 음식들이 이제는 하찮게 느껴지는 걸까? 내일 아침에도, 점심에도, 언제든지 올 수 있어서 그런 것일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한은 천천히 디저트 코너를 지나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먹는 것에 목숨 걸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뷔페라면 오동통한 아들 녀석부터 생각나는 게 당연했다. 한껏 들뜬 표정으로 접시를 잔뜩 채우던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들 녀석이 여기 왔다면 정말 환장하고 먹었을 텐데.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허전해졌다. 아들이 보고 싶었다. 이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만큼. 전화를 걸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선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는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선택자”라는 단어조차 생경했던 그날, 규칙을 신신당부하며 들려준 설명이 아직도 생생했다.

 

"절대 연락하지 마십시오. 특히, 전화는 위험합니다."


한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잘 몰랐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아들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 자신뿐 아니라 아이에게도 어떤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직접 만나러 가는 건 어떨까? 그건 또 괜찮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위험과 안전을 나누는 건지,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한의 귀에 들려왔다. 나노로봇 아이의 목소리였다. 한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네가 너무 심각해서 그래. 가끔은 조금 여유 좀 가져.'

'여유는 데이터 분석상 비효율적입니다.'


아이의 단호한 대답에 한은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넌 정말 재미없다니까.'

 

한바탕 아이와 말씨름을 한 한은 호텔 방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멍하니 밖을 바라다 보았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펼쳐진 야경이 환상적이었다. 아래쪽 도로 위에는 자동차들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들이 만들어내는 선들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도시 예술처럼 보였다. 그 장면을 내려다보며 한은 묘한 정복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단순히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들다니, 참 신기했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참 동안 야경에 빠져 있었다.

 

아이 역시 조용히 기다렸다. 귀여운 어린 용의 모습을 한 나노로봇 아이는 한쪽에서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평소처럼 잔소리를 쏟아내지 않는 모습이 이례적이다. 지금 한의 머리 생각을 훔쳐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에게 말을 걸어선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에서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이, 오늘은 좀 쉬고 싶다. 내일, 내일 이야기하자.”

아이의 작은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더 말하려던 것 같았지만 한은 이미 침대로 몸을 던진 뒤였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몸을 감싸는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손을 뻗어 이불을 잡아당긴 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호텔 이불 특유의 깨끗함과 은은한 세제 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옷을 벗을까?’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 겉옷이 자동으로 벗겨지며 나노로봇 아기 용에게 흡수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런닝셔츠와 사각팬티뿐. 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참 편리하네.’ 그는 런닝셔츠를 살짝 잡아당겨 냄새를 맡아봤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샤워를 하지 않은 지 꽤 된 것 같았다.

 

벌써 며칠 째지? 며칠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의 머릿속 계산이 멈췄다. 어이쿠! 진짜 시간이 빛의 속도로 지나갔구나.

 

샤워를 하고 잘까? 나노로봇 덕분에 샤워를 하지 않아도 항상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아이, 목욕물 좀 받아줘. 적당히 뜨겁게.”


아이의 작은 몸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잠시 후, 욕조에는 적당히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이 차올랐다. 한은 옷을 완전히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몸을 천천히 물속에 담갔다. 따뜻함이 전신을 감싸는 순간,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음악을 틀었다. 잔잔한 선율이 욕실에 퍼지자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차올랐다.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생각들, 다시 떠올랐다가 또 사라지는 잡념들. 그렇게 머릿속이 어수선해지던 찰나, 한 가지 생각이 모든 것을 밀어냈다.


‘300억.’


아, 그렇다. 지금 자신의 계좌에는 은행예금 100억과 현금 200억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나노로봇이 있다. 그건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 같았다. 세상에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는 힘, 그리고 끝없이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의 도구였다.

 

‘존나 좋다.’


한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는 욕조 안에서 편안히 기지개를 켰다. 다음엔 뭘 하면 좋을까?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욕조에서 나온 뒤 그는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온몸이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지만, 잠들고 싶지 않았다. 왠지 지금 잠들면 이 모든 게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게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아라.’


이렇게 달콤한 꿈이라면 영원히 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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