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결단 --------------------------------------------------------------------------------------------
"어이, 대장. 방법이 있긴 한데."
메흐디가 주저주저하다가 마지못해 입을 떼었다.
"그게 뭔데요? 생각나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세요. 지금 시간이 없어요."
한은 간절한 눈빛으로 메흐디를 바라보았다. 메흐디는 한을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떨군 메흐디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자네가 싫어하는 그거..."
"그거라니요?"
"거 있지않나... 그거..."
"혹시 그거?"
"그래 그거..."
"할아버지! 진짜 그거 말하는 거예요?"
"그래, 진짜 그거. 지금 그거 말곤 방법이 없잖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여기있는 모두가 다 알고..."
"아이 씨바 아아~~~~~ 알~~~~~! 거기서 스톱!'
한의 분노서린 외침에 대원들 모두 눈을 아래로 깔고 바닥을 쳐다보았다. 한이 미쳐버리면 답이 없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
미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잠깐동안의 정적을 깼다. 미아는 한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냥 손가락만 빨다가 죽을거야? 도대체 왜 안된다는 거야? "
"안되는 건 안되는거다. 아무튼 우리 팀은 절대 안돼! 우리 팀 대장으로서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이야기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놈이 있으면 해. 단 우리 팀에서 나가서 해!"
"아니, 이게 무슨 개~~똥고집이야? 지금 다른 방법이 있어? 그냥 다 같이 죽자고?"
미아가 참지못하고 바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미아도 돌아버리면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한과 미아 둘 다 꼭지가 돌아서 싸우게 되면 어떻게 될까?'
라마는 그런 상상을 하다가 절로 웃음이 났다.
"라마! 너 돌았냐? 지금 이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혼자 쳐 웃고 있냐?"
"대장! 말돌리지 말고 대답을 해! 대체 이유가 뭐야?"
"미아, 스톱, 스톱! 그만하라고 했지? 딱 거기까지만 해!"
"뭘 그만해! 지금 똥인지 된장인지 몰라? 당장 다 뒤지게 생겼다고!"
한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아를 더 이상 찍어누를 수 없다. 당장 뭔가 보여줘야만 한다. 어떻게?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한은 눈을 뜨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아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에게 그것의 허락을 강요했다. 라마는 자신과 미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볼 뿐이고, 메흐디는 자신의 눈을 피해 애먼 하늘을 응시할 뿐이었다. 유키는 눈을 감은 채 아무 생각이 없는 듯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대체 그거가 뭐예요? 뭘 알아야......"
메흐디는 라마의 입을 막으면서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었다.
"에이 썅.... 역시 다른 방법이 없어. 나라도 해야겠어."
미아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녀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우리도 그동안 싸워서 얻어놓은 괜찮은 나노로봇들이 꽤 되잖아. 지금 당장 좋은 놈 하나 흡수해서 우리 나노로봇을 강화하자고. 딱딱해진 내 머리에선 다른 방법이 딱히 없어 보이네만."
"그만 하세요. 제가 저번에도 확실하게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끼리는 그거는 안 하기로 약속하고서 팀을 이룬 거잖아요. 약속이 깨지면 팀도 없는 거에요."
"이런 개썅! 그럼 여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말해보라고. 이 썅놈의 대장아!"
한번 입이 터진 미아는 연거푸 거친 말을 쏟아내며 한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모르겠다고, 씨발! 나도 모르겠다고!"
한은 짜증이 폭발하여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팀원들 모두 놀라 대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이제 어떡해야 하나?'
한은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지금 기습을 한 녀석들은 지금까지 경험해 본 그 어느 누구보다 더 강했다. 상상 이상의 강함. 물샐틈없는 포위망과 쉴 틈을 주지 않는 끊임없는 화력으로 차륜전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불사의 방패 배리어가 10% 밖에 남지 않았다. 배리어가 깨지면..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 반격할 수 있을까? 아니 도망갈 수는 있을까? 여전히 대원들의 나노로봇 모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추측컨대, 평생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은 유니크급만 10여 명 이상이 공격에 가담하고 있다. 지금까지 확실히 파악한 유니크급은 8명. 아리까리한 유니크 급도 3,4명이다. 에픽급도 100명은 족히 넘었다.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다. 이 정도의 선택자들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은 거의 없다. 게다가 한 놈 한 놈 모두 훈련이 정말 잘된 녀석들이다. 도대체 어떤 조직일까?
냉정히 판단하자.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냥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러다 한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나노로봇인 '아이'도 오늘따라 조용했다. 온갖 것에 아는 척을 하고, 지적질을 해대던 유니크 나노로봇 아이가 이런 위험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나노로봇 '아이'가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진짜?
'예측을 하지 못한 걸까, 아님 말하지 않은 걸까? 그 제갈량 방통 사마의인 녀석이 이런 상황이 될거란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라...'
한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 지금까지 예측을 못해서 조용했다고 치자! 그래도 우리 팀의 공격과 방어 수단이 무엇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기습하는 적들의 공격력이 지금 어느 수준인지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기습 당시에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한참동안 공격을 받고 있는 지금은 다 파악이 끝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노로봇 아이 뿐만이 아니다. 팀원 모두의 나노로봇들이 한결같이 너무나 조용했다. 그 똑똑하던 녀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소라면,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바로 어떤 대안들을 내놓았지 않았나? 예측은 못했다 치자. 지금 이렇게 막판까지 몰렸는데, 왜 이리도 조용한 것일까? 다른 대안이 없어서 그 참견왕 '아이'가 조용한 걸까? 다른 나노로봇들도 가능성 있는 해답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걸까?'
쇠몽둥이 하나가 한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 녀석들 모두가 작당을 한 것이라면? 한의 아이가, 메흐디의 길가메시가, 라마 녀석의 가네샤가, 미아의 용광검이, 그리고 유키의 바스테트가, 모두가 함께 작당을 했다면?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이 딱딱 들어맞았다. 결국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나노로봇 업그레이드 때문인건가?
비어있던 퍼즐이 맞춰줬다!
"이 개 같은 자식들아!!!!!!!"
한은 화가 치밀어 올라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나노로봇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이 놈들 모두가 작당을 하고 작금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배신감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화가 쏟아져 나왔다.
"대장녀석 미쳤나부다."
라마는 눈이 똥그래져 다른 대원들을 쳐다보았다. 미아는 미친 놈처럼 혼자 길길이 날뛰는 대장의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억겁의 산전수전을 겪어온 베테랑 아닌가? 미아는 직감했다. 지금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자는 오직 자기 뿐이란 것을!
대장 놈은 혼이 나갔는지 개소리만 질러대고 있다. 라마와 할배는 아직도 대장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상태이고, 유키는 오늘도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 그동안 놀라우리만치 믿음직했던 대장은 지금 뇌가 정지되어 버렸다. 머리 속이 블루스크린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장 머리 속에서는 멍청한 자아와 덜 멍청한 자아, 두 개의 자아가 미친 듯이 싸우고 있을 것이다.
미아는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자신도 그런 상황,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불가능한 벽을 마주하게 되면, 머리 속 주름이 곱게 다림질 되듯이 아무 생각이 나지 않게 된다.
그렇다. 지금은 그에게 의지해야 할 때가 아니다. 미아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혼혈로써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제대로 된 삶을 살아 본적이 없었다. 중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의대를 갈 때까지 그녀는 주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정신적 지주였던 큰 언니는 그녀가 10살이 되기도 전에 지긋지긋한 가족의 품을 떠나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그녀는 꿋꿋히 정상인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꿈을 무던히도 방해했다. 마약에 절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고뭉치 오빠와 언니들, 그리고 일도 도움이 안되는 친척들까지 모두 그녀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했고 방해했다. '왜 쓸데없이 공부를 하는거야?'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다.
친척들과 친구들, 그리고 동네 주변 사람들 모두 제대로 된 삶을 살지 않았다. 다들 마약을 하거나 마약을 팔거나 몸을 팔거나 좀도둑질을 했다. 조금 성공했다고 하는 것이라곤 괜찮은 갱단에 들어가거나 그 갱단에 들어간 남자의 애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금의 삶을, 루저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친했던 이들은 그녀가 대학을 가려는 것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그것은 자신들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다.
그 한심하기 그지없는, 그렇지만 유전적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 무리에 의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은 순간에 깨달은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판단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과 행동은 옳았다. 미아는 그 지옥과 같은 곳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피를 흘리고 고통을 참으며 자신을 둘러싼 그 두터운 벽을 깨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음침한 지하세계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젖과 꿀이 흐르는 유토피아가 눈 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미아는 자기 머리를 세게 쳤다. 그동안 대장에게 의지를 너무 많이 했다. 다시 예전의 그녀로, 할렘을 벗어났던 용감했던 예전의 그녀로 돌아가야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직접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그녀는 결심했다.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다.
그녀는 배낭에서 거무튀튀한 조그만 구슬을 꺼냈다. 그리곤 주저없이 그 구슬을 두 손으로 반토막을 내버렸다. 깨진 구슬은 눈부신 섬광을 일으키더니 커다란 핏빛 쌍도끼로 변신했다. 이 쌍도끼로 변한 구슬은 에픽급 나노로봇, 조헌의 쌍도끼였다.기억도 나지 않는 예전 전투에서 얻은 것이었다.
미아의 유니크 나노로봇, 용광검은 순수한 퓨어 상태였다. 지금까지 다른 나노로봇을 흡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용광검이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노로봇들은 다들 강해지고 싶은걸까? 왜 강해지고 싶은거지? 저 미친 대장은 나노로봇의 흡수를 미친 듯이 반대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텐데. 그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하지말라고만 할 따름이었다. 대장의 스타일이 그렇다.
그녀는 대장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이것 말고는 정말 방법이 없잖아! 저 미친 싸이코 대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노로봇 흡수를 시도할 수 있는 자는 그녀 자신밖에 없었다. 미아는 두 손으로 쌍도끼를 감싼 뒤 두 눈을 감았다. 어떻게 흡수해야 하는지는 그냥 알 수 있었다.
용광검이 조헌의 쌍도끼 흡수를 시작했다. 쌍도끼에서 보라색 빛이 나오더니 미아의 온몸을 감쌌다. 그리곤 그 모든 빛이 미아의 온몸으로 한꺼번에 흡수되었다. 조헌의 쌍도끼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용광검이, 미아의 몸 속에 있던 용광검이 에픽급 나노로봇 쌍도끼를 흡수한 것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와우...굉장한 걸? 이게 이런 느낌이네. 흡수한 게 에픽이라 그런 가? 아님 같은 장비형이어서 그런가? 들었던 거보다 훨씬 더 좋은 거 같은데? 능력을 쓸 수 있는 에너지 게이지도 꽤나 많이 채워졌어. 이야~~ 이거 정말 장난 아니네!"
미아는 용광검의 업그레이드 효과를 온 몸으로 느꼈다. 나노로봇 용광검이 쌍도끼를 흡수해서 얻은 능력 상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능력 전이율이 50%가 넘네. 융합을 할 때, 20 - 30% 흡수하는 것도 대박이라 하지 않았나?"
"보통 에픽급 나노로봇을 유니크가 흡수할 경우, 기존 나노로봇의 능력을 흡수하는 전이율 평균은 24.7% 입니다. 미아님이 기록하신 51.7%는 정말 대박이 난겁니다."
"운이 정말 좋았네. 천무(天舞)~~~라, 이건 어떤 능력이지?
"조헌의 쌍도끼가 가지고 있던 특수능력을 전수받은 겁니다."
"오호라~~~ 자 보자, 보자. 사용시간이 2분? 뭐 조루긴 하지만 신체 능력 100% 상승은 나쁘지 않네. 광무(狂舞)하고 중첩 사용할 수 있나?"
"현재로선,불가능합니다."
"현재로선? 그럼 지금으로선 그냥 광무 다쓰고나면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써브용이네... 뭐 없는 것보단 낫겠지."
"조헌의 쌍도기를 100% 흡수 완료 후에야 진짜 업그레이드 효과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새로 생긴 특수능력인 천무나 용광검 자체의 능력치가 지금보다 더 올라갈 수도 있고, 간혹 천무 같은 새로운 특수 능력이 또 생길 수도 있습니다 "
"아직 완전히 흡수된 게 아니야? 그럼 흡수될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하나?"
"그건 아닙니다. 바로 움직이셔도 됩니다."
'언제 다 흡수되나?"
''나로로봇 흡수에 전체 에너지의 10%를 쓰고 있는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1시간 27분이 소요됩니다."
"음.. 1시간 27분이라. 이제 계속 전투를 할꺼니까... 흡수하는데 에너지를 나눠쓸 순 없을테고. 그럼 여기선 완전 흡수는 불가능하겠네!"
"전투에 100% 에너지를 쓰시게 되면, 말씀드렸듯이 나노로봇 흡수는 중단됩니다."
"아~~ 그런데 천무 말고 또 다른 능력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지? 어라? 용광검의 능력치는 지금 7%나 늘었어? 이거 정말 굉장한데? 100% 완료되면 더 오른다는 이야기잖아? 에너지 일부를 흡수하는데 써야 하나? 왜 다들 업그레이드, 업그레이드에 목을 매나 했는데...이건 정말 뿌리치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이네."
"100% 흡수 시, 제 능력치는 9.5% 상승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노로봇 용광검은 미아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대원들에게 양자통신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 정도의 효과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정도라면 시간을 꽤나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대원들도 자신을 따라서 나노로봇 업그레이드를 하게 된다면, 어쩌면 살아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른쪽 쌍방울 빌딩 쪽에 있는 애들이 원격 공격 위주라고 했지? 방어력은 약하겠네. 저 놈들을 공격하면 우리 쪽으로 오는 공격이 좀 줄어들겠지? 용광아, 저 쌍방울 빌딩으로 진입할 확률은 얼마나 되지?"
"현재 수준으론 58.3% 입니다.
"위험 요인은?"
"양각 집중 저격 시 입고 계신 나노슈트가 전파될 위험이 42% 입니다."
"그 정도면 오케이."
"사랑하는 대원 여러분! 다들 나한테 집중해. 대장은 듣기 싫으면 귀 막고 있어. 내가 저기 쳐들어간다고 해도 시간끌기 밖에 안돼. 다들 알겠지만, 이젠 결정해야 해! 다들 가지고 있는 나노로봇을 흡수해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구."
한은 조용히 미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진 않았다. 그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장. 너는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지금은 죽느냐 사느냐의 고비야. 그런 사람 잡아먹을 듯한 눈빛 같은 거도 보내지 말아줘. 그냥 짜그러져 있는게 지금 다같이 사는 길이야. 다른 애들이 흡수하는 거 방해하지만 말아줘."
라마누잔과 메흐디도 한의 눈치를 보다가 은근슬쩍 가지고 있던 에픽급 나노로봇 흡수를 시도했다. 대장은 애써 외면하려는 듯, 두 눈을 감아버렸다. 방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살아남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라마누잔이 가지고 있는 나노로봇은 가네샤로 유니크 나노로봇이다.
한 번 공격에 1000개의 유도 미사일을 날리는 원거리 공격형으로, 미사일 한발 한발의 파괴력이 장난이 아니다.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10발의 유도 미사일로 에픽급 나노로봇을, 400발로는 유니크급 나노슈트를 전파시킬 수 있을만큼 강력한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그런 1000개의 미사일을 한 시간 동안 5번이나 한꺼번에 날릴 수 있다. 재공격 쿨타임이 짧은 사기캐인 것이다. 하지만 나노슈트의 신체 강화는 2배에 불과하기 때문에, 접근전이 벌어지면 에픽급 나노로봇에게도 당할 수 있는 허접한 나노로봇이기도 하다. 원거리 공격형의 한계다. 미사일 재장전 쿨타임은 40분으로, 원격 공격할 때는 사기템이지만 불가능할 경우엔 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깍두기 신세가 된다.
지금 딱 그 상황이었다. 이미 20분 전에 그 다섯 번의 미사일 공격을 다 써버린 것이다. 대장도 다 쏟아부으라고 했었다. 지금과 같은 정도의 대규모 매복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피비빅. 퓨슈우우"
라마누잔의 첫 번째 나노로봇 흡수는 실패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나노로봇보다 한 단계 낮은 나노로봇을 흡수할 경우, 통상 흡수 성공율은 40~55%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실패하게 되면 본인의 나노로봇이 파괴되면서 본인 신체 일부와 나노로봇에 손상을 주게 된다.
건강하다고 자부했던 라마누잔도 꽤 많은 충격을 받았다. 신체적인 충격도 충격이지만, 정신적으로도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운이 좋기 때문에 한 번에 성공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라마가 아니었다. 가슴과 머리 쪽에서 심한 통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다시 한 번 흡수를 시도했다. 연속 실패 시 신체에 심한 충격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빙고!"
다행히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장비형 나노로봇인 예의 낙랑단궁을 흡수하여 새로운 특수 기술인 '아기살'이 생겼다. 유도 미사일 속에 아기 미사일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박! 나노로봇 가네샤가 재빠르게 계산 결과를 내놓았다. 현재 흡수율은 54%로 100% 흡수했을 때, 특수능력 대량살상은 23%의 공격력 향상과 17% 정확성이 향상되었다. 나노로봇의 능력치도 최대 14%가 증가했다. 쿨 타임까지 줄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라마누잔은 이 정도 성능향상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메흐디는 한 번에 성공했다.
메흐디는 생뚱맞게도 수인용 나노로봇인 나무늘보를 흡수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에픽급이 바로 나무늘보 나노로봇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방어형 나노로봇을 가지고 있어서 적을 죽일 기회가 많지도 않았고, 기회가 올 때마다 메흐디는 애써 살생을 피하려고 했기에 가지고 있는 나노로봇이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적들 중에서 얻은 나노로봇 중 에픽급은 나무늘보가 유일했다.
그 동안 덕을 쌓은 덕분일까, 메흐디도 엄청 좋은 능력을 획득했다. 길가메시 나노로봇의 능력치는 고작 3%가 늘어나는데 그쳤지만, '에너지 세이브'라는 새로운 능력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메흐디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능력이었다. 에너지 세이브라는 능력을 사용하게 되면 쿨타임이 있는 다른 특수 능력들의 쿨타임을 20%나 줄여준다. 중요한 것은 쿨타임이다. 쿨타임이 1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사기급 능력이다. 다른 팀원들이나 선택자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 길가메시의 특수 능력인 '불사의 방패'의 쿨 타임을 무려 12분이나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사용한 후 1시간 동안 입고 있는 나노슈트의 능력 저하가 50%가 발생하게 된다. 에너지 세이브를 쓴 이후 1시간 동안은 원래도 약했던 메흐디의 나노 슈트가 너덜너덜해진 넝마처럼 약해지는 것이다. 에너지 세이브를 쓰고 나면 불사의 방패 안에 있거나 아니면 미친듯이 도망다녀야만 한다.
유키는 계속 망설였다.
선택자가 된 이후에도 그녀의 햄릿 증후군은 고쳐지지 않았다. 진짜 흡수를 해야 하나? 흡수를 했다가 대장이 진짜 가버리면 어떡하지? 자신만이라도 대장의 말을 들어서 화를 좀 누그려뜨려야 하지 않을까?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이 급박한 순간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장은 개 같은 성격을 기본 베이스로 해서 지기 싫어하는 경쟁심과 나르시시즘, 그리고 사이코 기질이 잘 버무려 있는, 한마디로 사이코패스 미친놈이다. 하지만, 이런 난장판 세상 속 리더로서는 꽤나 완벽했다.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이고 계획적이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오히려 더 침착해지며, 무모하리만치 승리를 향해 달려갔다. 조금이라도 질 것 같으면 바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을 쳤다.
대장은 체면이나 정의, 도덕 같은 것은 것은 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이기기 위해선 무엇이든 했고, 살아남을 수 있겠다 싶으면 그 어떤 더러운 짓도 바로 실행하였다. 팀원 모두가 그의 단호한, 때로는 사이코패스 같고 비인간적인 행동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장 덕분에 모두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여러가지를 감안해 봤을 때, 그가 나노로봇을 흡수하지 않은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무엇인지 알아야 흡수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장의 성향으로 봤을 때, 지금으로써는 그리고 앞으로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흡수를 해? 이번만큼은 대장도 속수무책으로 보였다. 유키 자신이 봐도 이 난국을 헤쳐나갈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보여줬던 대장의 놀라운 능력으로도 문제를 해결하진 못할 것 같았다. 역시 흡수를 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는 나노로봇을 흡수하는데까진 동참할 수 없었다. 대장은 항상 자신의 말을 지켜왔었다. 이미 다른 대원 3명이 흡수를 했기 때문에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보이기도 했고, 대장의 지시를 어기는 것이 정말 싫었다. 지옥 속을 헤메일 때,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나면 대장은 100% 팀을 깨버릴 것이다. 깨진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유키는 대장에게 베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한, 눈치가 일도 없는 라마누잔이나 그런 10대 소년과 소크라테스식 문답 놀이를 곧잘 즐기는 착하고 정 많은 메흐디와 함께 하기엔,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엄혹하다. 유키는 정에 이끌려 질척거리다가 허무하게 죽어버린 선택자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지금 그녀에겐 칼같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냉혈한이 필요했다. 역시나 성격은 거지 같아도 능력 하나는 끝내주는 대장과 같이 가는 것이 그녀에겐 유일한 정답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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