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해진 미래 --------------------------------------------------------------------------------------------
"결국 시간이라는 게 그냥 공간이랑 붙어 있는 또 하나의 차원인 거잖아요?"
"오호, 민코프스키 해석이로군. 아인슈타인이 그 개념을 도입해서 상대성 이론을 완성한 거지."
"아, 그랬군요! 뭐, 그건 이해가 된다고 치고. 근데 이건 진짜 이해가 안돼요! 잠깐만요, 어디 보자… 여기 있다! 자, 읽어 볼게요!"
"'우리는 과거를 지나왔고, 미래는 다가오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을 현재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건 3차원 이상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변화하는 세상을 해석하려고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이게 이해가 돼요? 도대체 뭐가 환상이라는 거죠?"
"오, 블록 우주론이네? 아인슈타인이 시간의 동시성을 깨부쉈으니 그런 얘기도 충분히 나올 만하지."
"또또, 또 어려운 말 하시네. 저 진짜 모르겠거든요? 쉽게 좀 설명해주세요."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지. 진정한 지식은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만 쌓이는 법이야. ."
"알았으니까, 쉽게 풀어봐요."
"음, 보자 보자... 민코프스키는 알고 있지? 그는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했어. 그 썩은 동태눈같은 표정은 뭐냐? 풀어 이야기 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이미 거기 있다는 거야. 이미 존재해 있다는거지. 근데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면서 한 순간씩 차례로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거지."
메흐디는 진지한 표정으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라마를 바라봤다. 이 설명이 통할까? 라마는 여전히 먹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라마의 세상에 대한, 특히 과학에 대한 호기심은 끝이 없었고 7살 먹은 어린애처럼 엄청난 질문을 쏟아내곤 하지만, 이렇게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블루 스크린처럼 뇌가 멈처 버리곤 한다.
"지금 그게 쉽게 설명한 거예요? 할아버지 설명을 들으니 더 모르겠는데요?"
"음, 보자 보자... 다른 비유를 해주마. 라마군, CT 촬영 알지? 아플 때 병원에서 찍는 CT 말이야. 몸속을 보기 위해 2차원 이미지를 여러 장 찍어서 3차원으로 재구성하잖아. 사람의 몸 단면 하나하나를 찍어서 이어서 붙이면 우리는 몸속을 3차원 영상으로 재구성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거지. 블록 우주론도 비슷해. 우주가 이미 다 만들어졌다고 보는 거지. 빅뱅부터 우주가 끝나는 순간까지 이미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걸 한꺼번에 보지 못하고 하나씩 하나씩 '찍어서' 보고 있는 거야. 아직 못 본 미래도 이미 존재한다는 거지."
"아, 대충 뭔지는 알것 같은데... 이번 거는 정말 어렵네요."
"하하, 조금만 더 참아봐. 3차원 시공간을 CT처럼 쭉 연결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연결된 4차원 시공간이 완성되는 거야. 우리가 지금 지나가는 건 스포트라이트가 4차원 축을 따라서 비춰가고 있는 것뿐이지,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건 아니야. 우리가 못 본 단면이 이미 있다는 거지."
메흐디가 장황한 설명을 끝내자마자, 라마는 특유의 빠른 반응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이미 존재한다고요?"
"그렇지! That's corect! 바로 그거야!"
"엥? 그럼 미래도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잖아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그냥 박제처럼 만들어져 있다는 거예요?"
"결국 그런 셈이지. 결정론적인 우주론이라 할 수 있지."
"그럼 지금 이렇게 피똥 싸가며 싸우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이미 죽을 놈은 죽을 거고, 살아남을 놈은 살아남는 거 잖아요. 진짜 '케세라 케라' 아니에요?"
"그 이론이 맞다면 그렇다는 이야기지."
"맞다면?"
"그래 맞다면. 나는 그 이론이 맞다고 한 적이 없어. 과학이 그런 것 아닌가? 현재까지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가장 근사치의 답일 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나는 그 민코프스키 이론이란게 딱히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이게 또 무슨 신박한 소리죠? 아까는 제일 잘나가는 이론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잘나가는 이론이라고는 했지.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게 답이라고 말한 건 아니었네."
"역시 뭔가 더 있군요? 또 다른 멋진 이론이 숨어있는 거죠? 멀티버스나 시뮬레이션 우주 같은 허무맹랑한 거 말고요."
메흐디는 라마의 또랑또랑해진 눈빛에 살짝 당황하여 콧수염을 만졌다.
"뭐, 대단한 이론 이랄 것은 없고. 그냥 인생이 그렇게 딱 정해져 있다고 하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나? 그냥 우리가 사는 인생이란 것이 결론이 딱 정해져 있다고 보고 싶지 않을 뿐이네. 게다가 기를 쓰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우리들도 너무나 한심해 보이고 말야. "
"어우 진짜....한마디로 말하면 '그랬으면 좋겠다?' 이건가요?"
"인생 뭐 있나? 다들 그런거지. 허허허"
아니, 지금까지 지극히 과학적인 대화를 나눴는데 왜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세요?"
'미래 결정론'이라는, 무겁고도 철학적인 주제를 꺼냈던 라마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손에 묻은 먼지와 기름을 옷에 슬쩍 닦아내며, 두꺼운 검은색 뿔테 안경을 눈 위로 힘주어 끌어올렸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메흐디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은 언제나 그랬다. 매번 지적인 논의를 펼치다가도, 그 끝에선 늘 엉뚱한 철학적 농담으로 대화를 삼천포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게 또 메흐디의 매력이기도 했다.
"하하하, 너무 짜증내지 말고. 어쩌면 자네가 기대하는 멋진 이론이 어디선가 개발되고 있을지도 모르지. 인생은 모르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라마는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수많은 질문들이 마구 솟구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목숨 걸고 사는 게 결국 다 정해진 운명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죠? 우리가 피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면… 그게 과연 공평한 걸까요?”
라마는 메흐디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느끼는 이 무력함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위험을 넘기며 싸워왔고, 많은 것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그들에게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은 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메흐디는 라마의 질문에 직접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 라마에게로 돌아왔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가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중요한 거야. 어쩌면 그게 진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군."
그 말에 라마는 여전히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어쩌면 메흐디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미 정해진 미래일지라도,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을지도. 하지만 그건 너무나 인간적인 위안이었고,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여전히 불편한 진실처럼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메흐디에게 묻고 또 물을 것이다. 라마의 호기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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