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포위 --------------------------------------------------------------------------------------------
[베리어 40% 남았습니다.]
메흐디의 나노로봇이 대원 모두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남은 시간은?”
베리어 끝에 누워있던 한은 눈을 감은 채,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공격이 계속된다면, 6분 17초 후 마지막 배리어가 해제됩니다.]
메흐디의 나노로봇 ‘길가메쉬’는 차갑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마지막 생명줄이 6분 후면 사라진다고? 그때가 되면 우리에겐 뭐가 남지? 이대로 다 죽는 건가? 메흐디와 라마 저 한심한 또라이 둘은 기가 막히게도 태평하구나. 이해도 잘 되지 않는 과학 이야기를 이렇게나 오래 한다고? 이렇게 절박한 상황 속에서 !
한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다 죽게 생긴 상황에서 저런 한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평화로 가득찬 나른한 오후에 커피 한 잔을 하면서도 저런 이야기는 안하겠다. 저 녀석들의 엉뚱한 행동을 숱하게 봐 왔지만, 매번 새롭다.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견디기 힘든 짜증을 선사할까? 죽기 전에 저 녀석들 뇌구조를 꼭 한 번 보고 싶다. 정말 꼭.
"다들 입 닥치지 못해? 우리 지금 다 죽게 생긴 거 안 보여?!"
대장이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은 언제나 좋지 않은 징조였다. 배리어 안에서 날백수처럼 널부러져 빈둥거리던 팀원들은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 잡고 그를 쳐다보았다. 대장은 사이코 기질 10,000%였다. 고민하는 척하다가, 미친 듯이 웃다가, 멍하니 땅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화를 냈다. 그럴 때마다 큰일이 터지곤 했다. 욕설, 파괴, 심지어 물리적 공격까지 퍼부었다. 화가 나면 주변 100미터는 초토화되었다. 선량한 시민도, 생사고락을 같이한 팀원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물론 저런 지랄병이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적이 있을 때 그가 발작을 일으키면, 그보다 든든한 아군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120% 발휘했고, 적은 ‘100% 확률’로 죽었다. 제어할 수 없는 미친놈이라면, 바로 분노로 가득 찬 대장의 모습일 것이다. 대원들은 그를 무서워했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존경했다.
지금 대장의 폭발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의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두면 더 큰일이 날 것이 뻔했다. 결국 가장 나이 많은 메흐디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이런 게 한두 번인가? 우리가 함께 수많은 난관을 넘겼잖나. 이번에도 살아남을 거야.”
“닥치라면 닥쳐욧!”
한은 메흐디에게 버럭 화를 냈다. 나이가 많은 그에게는 거의 화를 내지 않았던 대장이었다.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헉! 알았네, 알았어.”
메흐디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배리어 안을 가득 채웠다. 대장은 대원들 하나하나를 쳐다봤다. 모두 그의 시선을 피하느라 바빴다. 너무 심했나? 지금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였다. 이 난관을 벗어날 기발난 묘수가 필요했다.
“메흐디, 이젠 그런 말 말고 방법을 좀 내봐.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거 없어요?”
“야, 뚱땡이. 헛소리는 그만하고 쓸만한 작전 하나만 말해봐.”
“유키! 힘든 거 아는데, 이제 일어나 니 생각을 말해줘. 네 머리 속에 분명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을 거야.”
“미아! 그 끔찍한 표정 좀 풀어. 네 번뜩이는 묘수가 필요해. 뭐 없어?”
하지만 그 끔찍한 정적을 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알고 있었다. 뾰족한 수는 없다는 것을.
“다들 정신 차려! 지금 SSS급 위기 상황이야. 저 새끼들 완전 약 빨았다고!”
“아니… 그게…”
“오케이, 뚱땡이. 뭐,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요… 지금 딱히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 괜찮아. 뭐든 말해봐.”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냥 편하게 말하라고. 뭐든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왜 저한테만 뚱땡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은 이름을 불러주면서 말이죠. 저 진짜 그 말 싫다니까요.”
라마가 조용히 있다가 끼어들었다. 그는 ‘뚱땡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버릇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내가, 메흐디가, 유키가 네 친구냐? 한 번 더 그러면 다이어트 바로 해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뭐 어때서요? 괜히 혼자만 지랄이세요. 그럼 누님들이라고 불러줄까요? 어차피 다 늙어가는 처지에…”
“혼자만 지랄? 정말 안되겠네. 거기 가만히 있어라. 다이어트하고 싶다고 했지? 내가 너 반으로 잘라줄게.”
“지금 그런 말 할 때냐!!!!!!”
라마와 미아의 말싸움은 단번에 끝났다. 한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벌써? 남은 시간은?”
[남은 시간은 3분입니다.]
3분? 고작 3분? 배리어가 깨지면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모두 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도망칠 방법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당장 능력을 쓸 수 있는 팀원은 하나도 없다. 앞선 두 번의 전투에서 모든 힘을 쏟아부어 버렸다. 만약 저 놈들이 일부러 차륜전을 이끌어냈다면, 200% 성공한 셈이다.
갑자기 뒷골이 서늘해진다. 지금까지의 전투가 녀석들의 각본이었다면? 그렇게나 치밀한 계획이었다면? 그럼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완벽한 놈들이라면 우리가 100% 전력일 때라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은 지금까지 상황을 다시 꼼꼼히 복기해 보았다.
눈앞에서 오늘의 기억이 빠르게 지나갔다. 놓친 것은 없는 지, 현재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공방전에서 특별할 것 없는 전투들. 갑작스런 공격, 도망칠 곳도 없는 넓은 평야, 몰려드는 적들, 그리고 지쳐 널브러진 대원들.
이 상황이 되도록 무엇을 놓친 것일까? 왜 놓친 것일까?
한은 눈 앞에 어른거리는 "47"이라는 숫자를 쳐다보았다. 나노로봇 아이가 가진 리저렉션이란 특수 능력을 다시 쓰려면 아직도 47분이나 남은 것이다. 지금 이 능력을 쓸 수 있다면 어떻게든 탈출구를 마련할 수 있을텐데. 저 재수없는 녀석들 중 대가리 급 몇 명은 없애버릴 수도 있을 텐데......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지금 당장 능력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저 순진한 녀석들은 이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눈치다. 순진한거야? 아님 멍청한거야? 이번에도 어떤 기발한 돌파구를 마련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이 느껴졌다. 희망을 버려!
한은 절망과 후회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결국 다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울리지 않던 공포가 그의 머릿 속을 스쳐지나갔다. 이번만큼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아악!”
한은 크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모두 자신의 방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자책을 했다. 시간 날 때마다 동료들에게 '방심은 목숨을 먹고 산다'고 앵무새처럼 이야기했건만. 정작 자신이 너무나 쉽게 방심해버린 것이다. 너무 나이브했다. 직전 전투에서 정말 많은 놈들을 없앴기에, 또 다른 적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경험 상, 이번 전투가 최대, 최악이었다. 하지만 항상 최대, 최악이었지 않았나? 그런데 왜 우리들은 이러한 기습을 전혀 탐지하지 못했을까? 꽤 높은 등급의, 어쩌면 유니크급 이상의 은신용 또는 탐지 방지용 나노로봇이 적에게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전세계적으로도 유니크급이 꽤나 희귀하지만,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대비했어야 했다.
왜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을까? 조금만 더 꼼꼼했다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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